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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일본의 밤문화 메이신유신 일어나기 전에 교토는?


일본에 밤 성문화는 메이지유신 전 교토 에도시대 때도 왕성했다.피임에 대한 대책이 아예 없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성문화에 대해서 개방적이었떤 일본에서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밤을 즐겼으며, 피임을 했을까?

에도시대 일본의 밤문화 메이신유신 일어나기 전에 교토는?

 


1. 에도시대의 밤문화

일본의 경악할만한 성문화는 무엇이 있을까?(확인)

 

기본적으로, 일본은 그 당시에 이미 남녀의 성접촉에 대해 지금과 같은 혼전 순결 등의 개념이 매우 희박한 편이었다고 한다. 물론 무가의 여인들과 같은 어느 정도 신분이 있는 사람들은 선을 봐서 시집을 가는 등 자유에 제한이 있었지만, 일반 마을 주민들은 상당히 자유로운 연애가 가능했다고 한다. 

 

2. 어떻게 헌팅을 했을까?

에도시대 때 러브레터는 어떻게 생겼을까?(확인)

 

보통, 마을이나 신사에 마츠리가 있는 날 등 특별한 날에 여자들이 나름 꾸미고 나가서 찻집이나 경단집 등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남자들이 가서 헌팅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물론 여기서도 무작정 하는 것은 아니고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뒤로 돌아가서 접촉을 했다고 한다. 현대의 통념상 여자가 화를 내는게 보통이겠지만 에도시대 땐 어느 정도 마음에 들었을 때는 별 저항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서로 눈이 맞으면 서로 쯔레부미(つけ文) 라는 일종의 러브레터를 보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해야 여자를 꼬실 것인가" 등을 가르치는 에도시대 교본이 팔릴 정도였으니 제법 수준이 높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만날 일시가 정해지면 조금 돈을 쓰는 경우 만남찻집(데아이차야-出会茶屋) 에서 만나곤 했다고 한다. 

 

3. 만남의 장소 찾집과 메이지 유신 이후의 상황

에도시대 찾집은 어떻게 생겼을까?(확인)

보통 이런 만남찻집은 호수나 개울 등을 끼고 만들어졌는데, 이는 기어올라와서 엿보는 사람들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과 즐거운 시간을 풍류와 함게 즐기라는 배려가 함께 들어있는 셈이다. 

이보다 돈이 없는 서민들은 무작정 절이나 신사 뒷편 , 혹은 풀숲에서 아오간(青姦) 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에도 시대까지의 일본남자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성을 즐기고 산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자유로운 연애 관념은 오히려 메이지 유신 이후 유럽 문물이 들어오면서 제한되었다고 한다. 레이디 퍼스트니 유럽식 숙녀의 개념 등이 도입되어 오히려 정조관념이 주입되면서 진보했던 성관념이 퇴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