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이지함은 머리에 철로 만든 갓을 쓰고 다니다가 배고프면 벗어서 밥을 해먹었다. 살아 생전에는 흙으로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이것은 양반같지 않은 양반 이지함에 얽힌 이야기이다. 조선시대 3대 기인중 한명인, 이지함. 토정비결의 작가인 그는 어떤 유년시절을 보냈을까?
토정이지함 조선시대 3대 기인 중 한명 토정비결
1. 토정이지함
토정비결이라는 책의 저자이며, 이로 인해 무속인들이 성리학자였던 그에게 기도를 드리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이지함은 이름있는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려시대 최고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세조때 이계전의 4대손이다. 이지함 위로는 3명의 형이 있었으며, 그는 그 중 이지번에게 글을 배웠다. 훗날 이지번의 아들이 선조대 동인과 북인의 우두머리가 되는 이산해이다. 즉, 이지함의 조카가 영의정 이산해이다.
이처럼 이지함은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난 아주 번듯한 양반집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14살에 죽고, 어머니가 16살에 죽었다. 그 와중에 이지함은 정종(조선제2대왕)의 증손인 이성랑의 딸과 결혼을 하게된다. 이때까지 이지함은 그냥 평범한 양반이었다. 23살에 아들을 낳는다.
2. 이지함 역모죄에 얽히다.
이치함이 과거시험을 준비하지만 형 이지번이 시험에 번번히 낙방하고만다. 형보다 앞서 과거시험에 합격하는건 당시 조선에서는 꺼려졌다고 한다. 이지함 역시 형이 합격할떄까지 과거시험을 못보고 공부만 해야 했다.
이때 이지함은 하도 할게 없어 서경덕의 제자로 들어가 공부까지 한다고 한다. 이지함에 30살이 되던해 드디어 이지번이 과거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이지함도 슬슬 시험을 보러 갈 때가 됬다.
이지함이 33살이 되던때 죽마고우였던 안명세라는 사람이 사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관이었던 그는 을사사화때 윤형원일파의 일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걸 윤형원 일파가 보게 되었고, 그를 모함해 죽였다. 이 때부터 그는 관직에 나가기 망설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홍남의 고변사건이 터진다. 이홍남의 동생 이윤흥이 왕에게 불충했다고 고했는데, 이 역모사건의 우두머리가 이지함의 장인인 이정랑이라는 이름이 거론됬다. 이지함의 처가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이정랑과 후손들은 왕실족보에서도 전부 삭제됬다고 한다. 이지함도 역시 연좌법에 의해 양반에서 천민신세로 전락한다.
3. 인생의 고난
이때부터 이지함은 처가식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했다고 한다. 흙집도 이때부터 살았다고한다. 이지함이 1570년 이홍남의 고변사건의 죄가 법적으로 사면되고 이지함은 자유인신분이 된다.
이지함에 스승인 서경덕은 성리학이 주가 되던 때 숫자를 좋아했다. 서경덕 역시 정치에 연을 끊고 학문과 후학양성에 몰두했던 학자이다. 과거시험은 장원급제 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스승이 없이 서당에서 한문을 떼고, 독학으로 학문을 깨우쳤다.
4. 토정비결
이지함은 서경덕에게 상수학을 많이 배웠는데 상수학이란 오늘날로 말하면 물리와 같은 개념이다. 어떤 현상을 숫자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숫자로 점괘를 표현해 사람의 미래를 보는것. 그 죳사기같은 것도 상수학의 일종이다. 서학의 과학이 바로 동양에서 말하는 상수학이었으며, 단지 서양은 자연현상을 탐구하면서 발전시켰다면 동양의 상수학은 사주나 보는 그런 일에 사용했다는 것이 다를뿐이다. 그리고 이걸 조합해 미래를 점보는 것이 사주팔자였고 이러한 학문과 일생이 발달하여 후에 토정비결을 쓰게 된다.